지구상에서 기체, 액체, 고체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물질은? 답이 퍼뜩 생각나지 않는다면 힌트 하나. ‘원래는 냄새도 없고, 맛도 없다.’ 이쯤 되면 대다수 사람들이 정답을 알아차릴 것 같다. 바로 ‘물’이다.
물은 수많은 지구상의 화학물질 가운데 과학적으로 가장 연구가 많이 된 물질이기도 하다. 화학식으로 흔히 ‘H₂O’로 표기되지만, 사실 순수한 H₂O는 그리 많지 않다. 물은 무엇인가를 녹일 수 있는 이른바 ‘용매’인 탓에, 우리가 물이라고 부르는 물질 속에는 다른 성분들이 일반적으로 섞여 있게 마련이다.
북극 그린랜드 주변의 빙하. 지구상 물의 총량은 1억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그러나 지구온난화로 얼음이 녹아내리면서 강수량이 보다 많아질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있다.(제공=킴 핸슨) |
한국인들에게 5~7월이 최근 들어 두드러진 ‘물의 계절’로 다가오고 있다. 5월에서 6월 초중순까지는 물이 없는 극심한 가뭄으로 물의 존재가 역설적으로 특히 부각된다. 그런가 하면 6월 중하순에서 7월까지는 시쳇말로 ‘물 폭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시기이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 탓일 확률이 큰데, 한반도에서 5~7월은 물에 관한 한 ‘극과 극’이 교차하는 시기로 굳어져가는 양상이다. 일찍이 과학자들은 지구온난화가 극단적인 기상 현상 등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한 바 있다. 예컨대, 비가 안 올 때는 오랜 기간 물 한 방울 기대하기 힘들고, 쏟아질 때는 걸핏하면 홍수가 될 정도로 엄청난 양을 퍼붓게 되는 식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물=생명’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과학자들이 화성에서 물의 흔적을 확인하고, 과거 혹은 현재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많은 동식물의 체 조직이 수분으로 이뤄져 있다는 점 역시, 물이 생명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인체의 경우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최소 50% 이상이 수분으로 구성돼 있다. 두뇌, 심장, 폐, 신장 등 주요 장기의 경우 이 비율이 70~80% 수준으로 훨씬 높다. 남녀 간에는 체지방의 비율 차이 때문에, 여자가 55% 정도로 수분 비율이 다소 적은 편이며 남자는 60% 수준이다.
한마디로 인류를 포함해 지구상의 온 생명체는 물의 지배를 받는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니 동서 고금을 통해 물의 존재가 문화는 물론 문명에까지 결정적 영향을 미쳐온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 동네는 물이 참 좋지.” 직장 동료나 지인들 사이에 다소 속되게 물을 빗대 환경이나 여건 분위기 등을 설명하는 예가 드물지 않다. 은유적으로 ‘물’이라는 단어를 문화적 경제적 풍속적 풍요 등을 상징할 때도 사용하는 것이다. 이밖에 ‘물을 흐린다’, ‘애들 보는 데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 는 등 평소 습속과 관련해 물을 거론할 때도 비일비재하다.
물은 문화를 지배하고 창출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 혹은 개인간의 교류 등을 매개하기도 한다. 물이 귀한 사막지역의 문화와 연중 강수량이 풍부한 우림지역의 문화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아울러 물은 종종 물적으로는 물론 인적 교류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과거 유행가 중에 “앵두 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밋 자루 나도 몰래 내 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로 시작되는 노래가 있다. 우물에서 아낙들이 정보를 교류하고 문화를 공유했던 것은 이처럼 과거 한국에서만 있던 일이 아니다.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던 나루터가 그랬듯 국경과 인종을 초월해 인류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물이 자원이요, 나아가 풍요의 밑바탕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극심한 가뭄 때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지만, 물은 돈으로 따지면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작물 수확기에 홍수가 쏟아져 질 경우 큰 경제적 피해와 인명 손실을 초래하기는 하지만, 적정하게 관리할 수만 있다면 물은 많을수록 좋다. 상시 빈곤에 시달리는 국가들을 상상해 보라. 물이 항상 부족한 나라일수록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을 확률이 높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사막의 베두인족이 물을 끓이려 하고 있다. 물이 부족한 사막환경이 그들만의 문화를 낳았다. 강수량의 적고 많음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제공=닉 프레이저) |
물이 풍부한 지역은 문화가 융성할 가능성이 높다. 다른 나라 예를 들 것도 없이, 서울을 비롯해 한국의 주요 도시들은 물이 풍부하거나 물을 활용하기 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풍부한 물이 도시와 개개인들에게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건 자명하다. 평소 햇빛과 공기의 소중함을 잊기 쉽듯, 물이 삶과 문화를 풍요롭게 한다는 점을 잘 깨닫지 못할 수는 있다.
생물학적으로 인체의 수분 비율은 남녀 차이만 있는 게 아니다. 사실 연령 측면에서도 차이가 있다. 생기 가득한 어린 아이일수록, 수분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반면 나이가 들어가면 몸에서 수분이 점차 빠져나간다. 연구에 따르면 신생아의 경우 무려 체중의 78% 가량이 물이다. 이 비율은 성인이 되면, 55~60% 수준으로 줄어든다. 특별한 질병이 아닌 자연사하는 사람들의 경우 죽음을 맞기에 앞서 보통은 서서히 체중이 빠지는데 이는 몸에서 수분이 많이 빠져나간 결과이기도 하다.
최근 수년 사이 빈발하는 기상 이변은 하나의 기후 시스템으로 고착화하는 경향이 있다. 즉 한반도의 경우 앞서 언급한 5~7월이 ‘제 5의 계절’로 자리 잡아가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5~7월을 강수량으로 표현하면, 전반은 ‘물 없는 여름’ 후반은 ‘물 넘치는 여름’으로 특징 지울 수 있지 않을까?
만일 이런 흐름이 굳어진다면, 각종 행사나 휴가 양상 등도 그에 맞춰 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8월말까지 이어지는 여름철의 문화 풍속도 또한 변화가 불가피하다.
강우 패턴의 변화는 여름 휴가 풍속도를 바꿔 놓을 수 있다. 지난 달 25일 부산 광안리해수욕장 앞바다가 초록 물감을 푼 듯한 녹색으로 변해 있다. 광안리해수욕장에는 2014년에 이어 올해 또 녹조 띠가 발견됐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특히 우천과 깊은 연관이 있는 작물 재배 양상 등도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난 수십 년 동안 확연해진 지구 온난화 현상이 사과의 주산지를 경북 등지에서 강원도 등으로 변화시켰듯, 벼를 비롯한 주요 작물의 재배시기 변화도 예상해볼 수 있다.
식량 작물이나 이 땅에서 생산되는 과일의 종류 변화 혹은 생산량 변화는 식생활 문화의 연쇄적인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강수량과 강수 패턴의 변화는 여가에서부터 먹을 거리, 일상문화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를 불가분 초래한다는 얘기다.
문화나 풍속 혹은 관습의 변화를 ‘교란’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화는 쉬지 않고 변해 왔고, 무엇보다 변화는 문화의 속성이기도 한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른 시각에서 접근하면 최근의 강수량과 강수 패턴 변화는 그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 한마디로 ‘물’ 여건 변화에 사람들이 대응하고 적응할만한 여유를 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화산폭발과 같은 자연 재앙이 과거 문명 자체를 송두리째 파괴해 버린 예들이 있다. 짧게 잡아도 최근 수년째 계속되는 ‘이상 강수 현상’은 재앙 수준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물이 일상과 한 시대의 습속, 문화 등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을 고려하면, 작은 이상마저도 가볍게 여길 수는 없다.
기상 이변으로 인해 과거와 강우 패턴이 달라질 경우 문화 자체가 변할 수 있다. 사진은 지난 8일 일본 규슈 후쿠오카현 기록적 폭우로 인한 피해복구 모습. (사진=저작권자(c) EPA/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공룡이 살던 시대 지구는 무더웠고 식생은 지금과는 딴판이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대기권과 지표면, 바다, 지하에 존재하는 지구의 물 총량은 사실상 전혀 변화가 없다. 수증기든 얼음이든 또는 이들의 액체 상태인 물이든 형태를 달리할 뿐, 전체 양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남북극의 얼음이 녹아 물이 되고 수증기가 되는 지구온난화 시대는 얼핏 물이 늘어난 것처럼 느껴질 수는 있다.
인간이 활용할 수 있는 물의 양이 많아진다는 건 얼핏 나쁜 소식처럼 여겨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적응 혹은 치수 범위를 벗어난 물은 크고 작은 재해를 불러올 수 있다. 문화의 변천이 아닌 문화의 교란은 적지 않은 이들에게 심적 물적 고통을 안길 지도 모른다. 지금은 물을 물로 우습게 봐서는 안 되는 시대인 셈이다.
◆ 김창엽 자유기고가
중앙일보에서 과학기자로, 미주 중앙일보에서 문화부장 등으로 일했다. 국내 기자로는 최초로 1995~1996년 미국 MIT의 ‘나이트 사이언스 펠로우’로 선발됐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문화, 체육, 사회 등 제반 분야를 과학이라는 눈으로 바라보길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