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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보복운전, 그 찌질한 분노에 대하여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요즘 뉴스에 자주 등장해서 누구나 다 아는 ‘보복운전’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매우 생소한 단어였다. 보복폭행, 보복살인이란 말은 있었지만 보복운전이란 말은 쓰이지 않았다.

이 말이 언제부터 쓰였을까 궁금해서 포털에서 찾아보았다. 오래된 순서로 뉴스를 검색해 보니 2005년과 2006년 처음으로 기자와 독자의 칼럼에 한 번씩 이 단어가 등장했다. 세 번째는 2011년 2월 15일 한 공중파 TV의 보도에서였다. ‘보복운전이 도를 넘고 있다’는 기획성 뉴스였다. 내용은 이랬다. “운전자끼리 신경전을 벌이다 앙갚음을 하는 ‘이른바 보복운전’ 이 많아지고 있다. 이로 인해 한 해에 35명이 사망한다. 그런데 운전자에겐 범죄라는 인식이 거의 없고, 처벌 수위도 미미해 문제가 많다.” 굳이 ‘이른바’ 라는 부사를 전제한 걸로 봐서 보복운전이란 단어가 이때까진 거의 쓰이지 않았던 걸로 십분 짐작이 간다.

우리나라에선 사회적 관심사가 대체로 일정한 패턴을 거치며 커져간다. 피해자나 목격자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포스팅을 하면-댓글 난리가 나고-유력한 전통매체들이 뒤이어 보도하고-관련 부처가 관심을 표명하고-눈치 빠른 의원이 개정법률안을 내놓는 순서다. 인터넷의 발전, 1인 미디어 세상이 불러온 사회적 아젠다(의제)의 형성과 발전 단계이다. 그리고 그 시작에는 늘 상징적 사건이 있었다.

2012년 8월 11일. ‘난폭 김 사장 사건’이다. 서울 용산구 어느 거리에서 외제 차량을 몰던 김 사장은 신호등이 바뀌었는데도 담배를 피우느라 가지 않았다. 뒤에는 임신부가 운전하는 차가 있었다. 그녀는 통증을 느껴 병원에 가던 길이었다. 경적을 한번 울리자 김 사장은 차에서 내려 갑자기 욕설을 퍼부었다. 그녀가 병원에 가는 급한 상황이라고 말했는데도 김 사장은 차를 따라가 진로를 방해하는 보복운전을 시작했다. 이 사건은 며칠 후 임신부의 남편이 보배드림이라는 자동차 커뮤니티에 블랙박스 동영상을 올리며 알려졌다. 관련 보도가 홍수처럼 터졌고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최근의 일이다. 운전을 하고 가다 앞 승용차에서 ‘충격적’인 스티커를 보았다. ‘저, 밥 해놓고 나왔어요.’ 40대로 보이는 여성 운전자였다. 순간 이게 애교인가, 유머인가 생각했다가 곧 기분이 씁쓸해졌다. 이 문장만큼 한국 남자의 운전 매너를 희화적으로 그리고 처절하게 비꼬는 게 있을까. 아직도 한국 남자 중에는 여성 운전자를 ‘이상하게 취급하는 꼰대’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인터넷에서 초보운전 스티커를 찾아보았다. ‘남편이 옆에 있어요. 울 남편 화나면 개가 됩니다’ ‘당황하면 후진해요’ ‘먼저 가세요, 난 이미 틀렸어요’ 이런 협박성, 애교성 스티커 문안들이 다양하게 소개돼 있었다. 왜 그들은 첫 운전을 시작하면서부터 이런 막연한 두려움을 가져야 하는 걸까.

보복운전이란 단어가 등장한 지 불과 5년이다. 이제는 하루에만도 예외 없이 수십 건 이상 보복운전 관련 뉴스가 검색된다. 자동차가 흉기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일반화되고 보복운전에 대한 처벌 기준이 상당히 강화되었는데도 그렇다. 심지어 살인미수로 처벌한 판례까지 나왔다. 4년 전 그 당시만 해도 보복운전은 범칙금을 떼는 정도였다.

갑자기 한국 운전자들의 난폭성과 분노지수가 높아진 걸까. 수치상으로도 분명 많아졌는데 그건 경찰의 지속적인 집중단속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운전을 하는 나는 피부로 느낀다. 확실히 운전자들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전보다 신경이 쓰인다. 잘못하면 나도 험한 꼴을 당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에 교통법규를 더 잘 지키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엔 창밖으로 손을 흔들어주거나 비상등을 깜박여 사과나 감사를 표시한다. 솔직히 나의 진심이라기보다는 방어본능에 가깝다.

평소엔 점잖던 사람들도 왜 운전대만 잡으면 쉽게 ‘헐크’로 표변할까. 어느 조사 결과를 보면 고학력 고소득층이 보복운전을 더 자주 하고 대다수 평범한 직장인이 많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여러 이유를 든다. 성미 급한 다혈질 국민성, 경쟁과 스트레스가 심해지는 사회구조, 개인의 분노조절장애 등.

요즘 ‘분노’가 우리 사회의 콘텐츠가 되어버린 듯한 세상을 살고 있다. ‘헬조선’이나 ‘흙수저 금수저’는 청년들의 분노가 만든 말이다. 얼마 전 1000만 관객을 돌파한 한국 영화들도 부당하게 돈을 가진 자, 권력을 쥔 자에 대한 분노와 응징을 그린 것이었고 관객은 대리만족했다. 그런 분노는 공분이거나 공분에 가깝다. 모든 공분이 의로운 것은 아니겠지만 부당함에 대한 집단적 분노는 그 사회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보복운전의 분노는 개인적 화풀이이고 앙갚음일 뿐이다. 그건 그냥 ‘핏대’이다. 분노에도 격이 있거늘, 그건 개념 없는 3류 분노이다. 이런 분노야말로 마땅히 공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보복운전 심리에는 분노조절장애니 뭐니 하는 어려운 말도 있지만 쉽게 말해 이런 뒤틀린 정서가 바탕에 깔려 있다.
“니가 뭔데 날 무시해?” “너까지 날 무시해?” “건방지게 어따 대고 000이야?” “좋아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볼래?” 이런 심리다. 자신의 차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오늘도 고속도로에서 고속버스 기사가 차선을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광역버스에게 보복운전을 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젠 가해자가 자가용 택시 버스 트럭 자전거 남자 여자 구분이 없을 정도다. 세상살이가 점점 팍팍하다. 어느 순간 나 자신도 자칫 가해의 충동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런 자기 주문이 도움이 될까. “이건 정말 찌질한 분노야. 양보하고 웃어주자. 그게 내 격을 스스로 높이는 길이야.” 그리고 하나 덧붙인다. 요새는 CCTV나 블랙박스가 당신이 한 일을 다 알고 있다고.

한기봉

◆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인, 인터넷한국일보 대표이사,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언론보도로 피해를 입은 사람을 구제하는 언론중재위원회 언론중재위원이며,국민대 언론정보학부에서 강의하고 있다.

2016.03.21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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