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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군번도 계급도 없는, 나는 학도의용군이었다!

호국보훈의 달 특집]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최기영 대표

 

(정책기자단|신서연)내가 학도의용군으로 전쟁에 참가한 게 지금 기자님 나이, 19살이었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19살 필자 앞에 66년 전 같은 나이에 펜 대신 총을 잡고 전쟁터에 나섰던 학도의용군을 마주하다니. 최기영 할아버지 역시 필자를 보면서 시간을 거슬러 6.25 전쟁 당시 평범한 소년이었던 19살의 자신을 떠올리셨다.

6.25전쟁 때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한 최기영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대표.
6.25 전쟁 때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한 최기영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대표.

 
중학교 5학년, 19살의 나이로 학도의용군에 지원
“1950년 중학교 5학년 때였어. 지금하고는 학제가 달랐으니까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 2학년, 19살이었지. 6월 25일에 전쟁이 일어나자 딸 많은 부잣집의 외동아들이라 부모님은 나를 멀리 피난 보내고 싶어 하셨어. 적군이든 아군이든 간에 군인이 모자랐기 때문에 청년들은 학도병이 되거나 아니면 인민군이 되거나, 그 선택 밖에 없었거든. 아들이 전쟁터에 내몰리는게 싫었던 아버지가 돈과 미숫가루 같은 양식을 챙겨주셔서 친구 네 명과 피난 다니다가 보니 이게 아니다 싶은거야. 결국 8월 달에 학도의용군에 자원했지. 그 시절 꿈이 훌륭한 군인이 되는 것이었는데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게 살았던 거지 뭐. 전쟁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거야. 육군 제3사단 23연대 수색중대에 소속이 됐는데, 포항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한밤중에 어딜 데려다놔도 길을 찾을 수 있었지.”

포항중학교 학도호국단. 노란색 표시된 사람이 최기영 할아버지. 출처=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포항중학교 학도호국단. 노란색 표시된 사람이 최기영 할아버지.(출처=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전쟁이 일어난 지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됐다. 유엔연합군은 시간을 벌기 위해 왜관과 기계, 포항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해야했다. 이 방어선이 뚫리면 부산마저 순식간에 점령될 위기였다. 전국에서 약 5만 명의 10대 중반에서 20대 초반 학생들이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했고, 학도의용군이 참전한 대표적인 전투는 1950년 8월 11일에 일어난 포항여중 전투였다.

우리나라 학도의용군의 활약이 가장 뛰어났던 포항여중 전투
“포항은 바다와 미군 비행장을 갖춘 요충지라서 제해, 제공권을 다 빼앗길 상황이었어. 당시 남학생들뿐만 아니라 시내 유일한 여학교였던 포항여중 여학생들도 전쟁이 나자 학도의용군에 자원을 해서 주먹밥도 만들고 했지. 군번도, 계급도 없었고, 교복을 입은 채 전쟁에 참가한 학생들도 많았어. 육군 제3사단 소속 학도의용군은 모두 71명이었는데 개인당 소총 한 자루와 실탄 200여 발 그리고 약간의 수류탄만을 받은 채 군의 지휘도 없이 학도병만으로 북 유격대원 3000여 명의 기습에 대항해서 치열하게 싸웠어.”

수많은 학도병들이 펜 대신 교복과 교모를 쓰고 전쟁에 참여했다. 출처=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수많은 학도병들이 펜 대신 교복과 교모를 쓰고 전쟁에 참여했다.(출처=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포항 시가지와 기계면, 경주 안강읍,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등지는 나라를 시키기 위한 최후 방어선으로 밤낮없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포항 전투에는 전국에서 온 학도의용군이 참전을 했다고 최기영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자그마치 8시간 동안 이어진 사투. 학도병들은 초전에는 적을 격퇴시키는데 성공했지만 북한군이 다시 장갑차를 앞세우고 공격해오자 포항여중 운동장에서 백병전까지 벌이는 치열한 격전을 치렀다. 71명의 학도의용군 중 48명이 포항전투로 전사를 한,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학도의용군이 희생된 격전지가 됐고, 그 시간동안 시민들은 무사히 구룡포, 부산 등지로 피난을 갈 수 있었다고 한다.

포항전투를 배경으로 만든 2010년 이재한 감독의 영화
포항전투를 배경으로 만든 2010년 이재한 감독의 영화 ‘포화속으로’. 최기영 할아버지는 이 영화의 자문을 맡으셨다.(출처=영화 ‘포화속으로’의 한 장면)

 
“잘 싸웠어. 우린 정말 용감했고.”
최기영 할아버지는 주먹을 불끈 쥐며 힘주어 말씀하셨고, 그 한마디에 필자도 가슴 속에서 뭔가가 울컥했다.

총상을 입은 천마산 전투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1950년 8월 21일의 천마산 전투였다. 적은 인민군 5사단 유격 766부대였다. 천마산 정상에서 왼쪽으로는 7번 국도가, 오른쪽으로는 바다가 훤히 보이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천마산 정상을 차지하면 적의 육상, 해상 수송을 차단할 수 있었다. 여섯 번 빼앗기고 여섯 번 되찾은 천마산 전투. 밤이면 인민군에게 빼앗겼다가 낮이 되면 국군이 되찾기를 반복했다.

참전 초기엔 두려움에 떨면서 대포소리가 나면 바위나 나무 뒤에 숨기도 하다가 전쟁은 점차 익숙한 일이 되어버렸다. 옆에서 죽어나가는 전우들을 보며 죽을 때까지 견디고 적과 싸워야겠다는 생각, 조국과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죽는 것이 남아로서 타당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셨다고 한다.

죽어가는 전우들의 마지막 말은 한결같이 “어머니!”였다.
“총을 맞아 저승에 갈 위기에 있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입에서 나온 말이 뭔지 아는가? 죽어가는 전우들 입에서 나온 말은 한결같이… ‘어머니!’였어.”

최기영 할아버지도 천마산 새벽 전투에서 오른쪽 엉덩이를 관통하는 총상을 입으셨다고 한다. 부산 육군병원에서 2년 6개월 동안 치료를 받고 돌아와 보니 포항 시내는 잿더미로 변해버렸고 소중한 가족도 잃었다.

“피난길에 오른 주민들을 미군이 인민군으로 오해하고 공격한 거야. 임신 중이셨던 어머니와 어머니 등에 업힌 3살 먹은 동생, 한순간에 세 식구를 잃어버렸어.”

지금도 천마산 고지에 가면 한없이 착잡하고 눈물이 흐른다고 하신다. 너무나 많은 것을 앗아간 전쟁이었고, 아픔이 많은 만큼 자유의 소중함을 느낀다 하셨다.

인민군 5사단 육군 766부대와 싸워 여섯 번을 빼앗기고 여섯 번을 되찾은 천마산 전투. 출처=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인민군 5사단 육군 766부대와 싸워 여섯 번을 빼앗기고 여섯 번을 되찾은 천마산 전투.(출처=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전투를 치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두터운 전우애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냥한 적으로부터 친구가 살려주기도 했다. 전투 속에서 깨달은 건 전우와 군기의 중요성이었다. 서로 형처럼, 아버지처럼 믿고 따라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야간 전투에서 적군과 서로 총구를 보고 쏘는데, 난데없이 국군이 내 호에 쑥 들어오더니, ‘너도 적군의 총구에서 나오는 섬광을 보고 쏘듯 적군도 마찬가지다. 두 탄창만 쏘고 위치를 변경하라. 아니면 바로 죽는다.’ 이러는 거야. 그러고는 또 다른 학도병에게 가고… 훈련도 제대로 못 받고 전투에 투입된 학도병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오던 군인을 보며 느꼈던 두터운 전우애가 가장 기억에 남아.”

60여 년간 가슴에 새겨온 전우에 대한 사랑, 그런 마음으로 최기영 할아버지는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을 세우셨다. 전쟁으로 인한 부상을 치료한 후 다시 포항으로 돌아와 폐허로 변해버린 고향을 보며 전쟁의 무서움을 실감한 순간, 우리 후대에 이런 일이 다시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 전쟁의 참상과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고픈 마음이었다고 하셨다.

2002년 9월에 개관한 전국 유일의 포항 용흥동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2002년 9월에 개관한 전국 유일의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포항시 북구 용흥동).

 
전국에서 유일한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을 세우다.
“해마다 6월 호국보훈의 달만 되면 나는 주위의 격려와 관심으로 잘 살고 있어. 그러다 간혹 꿈속에서 반복되는 전우들의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그들의 희생을 기리고 싶었지. 그들을 잊혀지게 만들면 안되겠다, 내 일생의 책임이자 목표였어, 전승기념관을 짓는 게.”

그러면서 힘겨웠던 건립과정을 생각하시며 눈시울을 붉히셨다. 청와대와 보훈처를 뛰어다니며 기념관 건립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개인 재산을 털어 기념품들을 수집하기도 했다. 그렇게 2002년 9월 개관하기까지,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을 짓기 위해 30년, 관련 자료를 모으는데 40년이 걸렸다.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에는 6.25전쟁 당시 사용했던 무기류와 유품들이 전시돼 있고,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에는 6.25 전쟁 당시 사용했던 무기류와 유품들이 전시돼 있고,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전국에서 유일한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이다. 1층 전시관엔 6.25 당시 사용했던 무기류와 유품, 전투모형 등 95점의 물품들이 전시돼 있고, 2층 시청각실에는 6.25 전쟁의 참상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고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먼지 묻은 학생들의 옷과 신발, 일기장을 보고 있으니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평화가 너무도 소중하게 생각됐다. 그리고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전승기념관을 짓고 나니 사방에서 청소년들이나 군부대, 기업체 할 것 없이 견학 신청이 몰려드는 거야. 전국 현충시설 중에서 고객만족도 1위를 차지하기도 했고. 이제 저승에 가서 전우들 만나도 덜 미안하게 됐어.”

국립묘지가 아닌 전우들 옆에 잠들고 싶은 최기영 할아버지
최기영 할아버지는 전국에서 유일한 학도의용군 생존자다. 돌아가신 후에도 국립묘지가 아닌 학도의용군 1394위의 영령이 있는 포항 용흥동 충혼탑에 잠들고 싶다하시며 먼저 간 전우들에게도 전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하셨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먼저 간 전우 여러분의 권위와 확고한 애국심을 알렸으니, 이제 안심해도 좋습니다.”

최기영 할아버지는 국립묘지가 아닌 이 곳 충혼탑, 전우들 옆에 잠들고 싶다하셨다.
최기영 할아버지는 국립묘지가 아닌 이 곳 충혼탑, 전우들 옆에 잠들고 싶다 하셨다.

 
나라를 위해 힘껏 싸워주셔서 감사하고 오래오래 사셔서 저 같은 청소년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달라 말씀드렸더니,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이었다 하시며 선배들이 만들어 준 평화니 공부 열심히 하고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말라 당부하셨다.

펜 대신 총, 칼을 들고 나라를 위해 헌신한 학도의용군.
그들을 기억하는 6월이 됐으면 한다.


정책기자단|신서연backto149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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