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김명성기자] 지난 20일 국정감사장에서 원희룡 제주특별자치도지사는 지난 광복절 75주년 경축식에서 있었던 발언에 대해 의원들로부터 지적을 받았다.
먼저 이형석 의원은 원 지사가 2005년 대표발의한 ‘일제강점하 민족차별옹호 행위자 처벌법'에서 제안했던 입장과 지금의 입장이 다른 이유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원 지사는 "(김원웅 광복회장의 발언과 관련해) ‘역대 21대 육군총장 모두 친일파 옹호한 앞잡이다’등은 제가 아는 역사적 팩트와도 전혀 다르다”라고 주장하며 반박했다.
이어서 서영교 위원장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원 지사 발언 중 ‘태어나 보니 일본식민지의 신민으로 살았다’라는 표현의 부적절성을 제기하며, “‘신민’이라는 표현을 우리 스스로 쓰는 것은 맞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하자, 원 지사는 이를 인정하며,“ 동의합니다. 워낙 즉흥적으로 얘기하다 보니까”라고 말했다.
하지만 서영교 위원장이 “만주토벌대가 되어서 우리 독립군을 토벌했던 군인들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단죄 받아야 되는 인물로 정리해야 된다”고 재지적한 것에 대해서
원 지사는 “1934년 이후에는 독립군 만주 토벌 자체가 없습니다. 역사를 공부해 보면 그게 다 나오는 사실이거든요. 34년 이후에 일본 육사에 들어간 사람들 보고 독립군 토벌대라고 하는 것은 역사의 기초사실조차도 안 본 분들입니다. 저만큼 공부를 안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서영교 위원장이 국사편찬위원회 등 자료에 의거해 역사적 사실관계를 확인한 결과, 1934년 전후 만주에 있던 독립군‧항일세력 토벌은 관동군을 포함한 일제의 업무 중 하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이들에게 협조한 일부 전향한 조선인들 역시 수많은 양민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별첨)
역사적 사실 확인 결과를 토대로, 서영교 위원장은 원 지사에게 유감을 밝히며, “1934년 전후, 독립군 등 만주에 있었던 항일세력 토벌은 관동군의 중요 업무 중 하나였다. 또, 1936년에 조직된 조국광복회는 보천보전투를 통해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38년 만들어진 간도특설대는 우리의 조선항일세력 토벌에 적극 참여했으며, 여기에는 전 육군참모총장이 속해 있었다. 이와 같이 독립군과 항일 투사들에 대한 토벌은 우리의 아픈 근대사에 계속 등장한 것이다”라고 밝히며,
“일제 관동군이 많이 주재했던 당시 만주국에서 독립군 등 항일세력에 대한 토벌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제의 식민지배 논리를 인정하는 것으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잘못된 발언”임을 지적했다.
이형석 의원 역시 22일 국감장에서 원 지사를 향해 “제가 아는 역사 상식으로는 1937년까지도 만주에서 독립군들이 활동을 했다. 37년에 팔로군이 창설될 때에도 팔로군과 노선은 달리하지만 항일투쟁을 위해서 팔로군에 함께 독립투쟁을 하거나 또 팔로군에 소속돼서 싸웠던 독립투사들이 있다”고 강변했다.
서영교 위원장은 “물론, 어쩔 수 없이 일제에 의해 군인이 된 경우 그 처지를 이해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우리 조선인들이 중심이 된 항일세력을 처단하는 관동군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복무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더 엄격한 역사적 평가를 내려야 한다”고 입장을 밝히며, "올바른 역사인식은 대한민국 정치인의 기본자세이자 신념이다"고 강조했다.
◎별첨 | 역사적 사실관계 확인자료 |
① 1934년 전후, 독립군 만주토벌은 관동군의 일상적 업무
- 당시 만주는 일제에 의해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이 세워졌다. 이후 독립군 만주토벌이 없어졌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시적으로 이뤄지면서 일제 관동군의 일상적 업무가 되었던 것이다.
- 특히, 만주를 점령하고 있던 일제 관동군은 1936년 2월 이후 소위 ‘제3기 치안숙정계획’을 세워서, 반만 항일 세력을 제거하려 계획을 구체화해나갔다.
- 이 같은 관동군의 계획에 호응해 괴뢰 만주국 군정부측도 36년 4월 <치안숙정 3개년 계획 요강>을 제정했고, 일·만 당국은 이 공작의 대상으로 남만의 동변도 지역을 대상으로 36년 10월부터 37년 3월까지 ‘동변도 치본공작’이라는 항일세력 말살공작을 추진했던 것이다.
- 이에 따라, 만주국은 1936년부터 '만주국 치안 숙정계획 대강'을 실시하여 무장투쟁세력을 소거하기 위한 혹독하고 잔학한 ‘삼광작전' (살광(죽임, 殺光), 소광(불태움, 燒光), 창광(빼앗음, 槍光))을 실시했고, 독립군은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② 간도특설대
1938년 조선인 중심으로 조직하여 1939년부터 본격적인 작전을 수행, 일제 패망 때까지 존속했다.
항일무장세력과의 전투를 치루기 위해 각 내무반을 여러 개의 조직으로 분할했으며,
만주국 참의원 이범익 등이 주장한 '조선 항일세력은 같은 조선인이 잡자’는 의견이 실제로 형성 과정에 영향을 주어 장교를 제외한 중간 간부와 일반 병사들은 다수가 조선인으로 채워졌다. 특히 일반 병사의 경우 전원 조선인 지원병으로 구성되기도 했다.
초기 활동은 간도특무기관장 오코시 노부오 육군중좌의 통제 아래 이루어졌으며, 본격적인 활동은 1939년부터 시작한다.
전 육군 참모총장도 간도특설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간도특설대 장교의 회고록에도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간도특설대가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어 커다란 전과를 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였고 간도특설대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 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③ 조국광복회의 독립운동
- 조국광복회는 당시 만주국에 맞서 싸우기 위해,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한국인 지휘관들이 중심이 된 민족 통일전선 단체이다.
이들은 일제탄압이 극심했던 당시에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 북부 혜산진에서 20㎞ 떨어진 보천보에서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체국 등의 관공서와 산림보호구 등을 공격하고 ‘조선민중에게 알린다,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등의 포고문과 격문을 살포했고, 만주에 주재한 일제에 항거한 것이 한반도 내에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④ 훈춘정의단
- 훈춘정의단은 1934년에서 1935년경 재만 독립군을 탄압하고 귀순자를 처리하기 위해 설립된 친일 단체이다.
- 훈춘과 연해주 접경에 9개의 무장 분견대를 설치해 독립운동자들을 탄압하고, 귀순시켰다(무장 분견대의 대원들은 독립군들을 토벌하고 체포하여, 그들을 친일 세력으로 귀순시키는 일을 담당).
훈춘 일본 영사분관과 일제 헌병대의 후원과 통제를 받으며 친일 반민족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⑤ 간도협조회
- 1934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친일 단체.일제 헌병 중좌 가토(加藤)의 주선으로 창설되었다.
강좌·강연회 등을 통한 간도 교포의 사상 교정, 밀정 투입에 의한 조직 교란, 귀순 공작, 귀순·투항자의 직업지도와, 일본군과 만주군의 보조 병력으로서의 첩보· 토벌작전 수행했다.
<참고자료>
-「신편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 두산백과사전, 세계한민족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