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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 독립과 민족 총화를 이룩한 3·1운동

윤주경 독립기념관장

〔한국방송뉴스/박기순기자〕 1919년 3·1운동에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200만 명이 넘게 참가했으며 1500여 회에 달하는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일제의 총검아래 7500여 명이 살해당하고 부상자가 1만 6000여 명에 달했으며 5만여 명이 체포·투옥되는 참화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 엄청난 희생은, 한국 민족이 존재해야 할 가치와 의미를 진정하게 보여준 것이었기에 결코 헛되지 않았다.

3·1운동은 사회 모든 계층을 망라해 전 민족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세운동에는 남녀 성별의 차이도 없었고 종교 간의 반목도 없었고 직업의 귀천도 없었다. 그리고 한인이 사는 곳이라면 국내뿐 아니라 해외 어느 곳이든지 하나가 돼 만세운동을 벌였다. 종교계와 학생이 앞장서고 농민과 노동자가 군중을 이루고 어린이·걸인·기생까지 만세운동에 동참하면서 독립운동을 대중적으로 확산시켜 나갔다.

3·1운동은 무엇보다 민족적 총화를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주목돼야 한다. 서로 다른 정파의 종교지도자들이 종교 이념을 떠나 머리를 맞대어 만세시위를 추진해 갔다. 종교 이념의 차이는 있었을지 몰라도 그것이 민족독립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장애가 되지 않았다.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의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독립을 선언하고 전국의 종교 조직을 기반으로 3·1운동의 대중화에 불을 댕겼다.

그리하여 중앙의 종교계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천도교 신도들과 기독교 신도들이, 또는 불교 승려와 기독교 전도사들이 힘을 합쳐 만세운동을 벌여 나갔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오로지 민족독립을 위한 광장에서 하나가 되어 간 것이었다.

서로 다른 종교인들이 민족독립을 위해 통합했던 것은 세계사의 유례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 민족주의의 특질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민족독립을 위해 힘을 모았던 것이기도 했다. 

이런 민족적 총화를 바탕으로 독립을 선언한 것이 3·1운동이었다. 일제 식민지 지배를 부정하고 민족독립을 선포한 것은 가히 ‘혁명’이라 일컬을 만했다. 독립을 선언하고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짖은 것은 3·1운동이 추구한 최고의 이념이자 방략이었다.

또한 그 결실로서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지 10여 년 만에 독립운동의 힘으로 대한민국을 세운 것이었다. 그렇게 볼 때 대한제국으로 망한 나라를 국민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으로 새롭게 세운 것이 3·1운동이고 구시대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한 것도 3·1운동이었다.

때문에 3·1운동은 역사를 발전시켜 나간 근대화운동의 성격도 함께 지니는 것이었다. 독립운동은 민족독립을 위한 투쟁만이 아니었고 근대화를 촉진시킨 민족운동이기도 했다. 이러한 한국의 독립운동은 인류 평화를 염원하는 정신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혹자가 주장하듯이, 식민지 상태에서 근대화가 진전됐다는 소위 식민지근대화론은 어불성설이자 괴변에 불과한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3·1운동을 통해 민주주의의 길을 열어 놓았고 근대화를 이루어 나갔던 것이다.

3·1운동의 물줄기는 한국 근대사에서 구시대와 신시대를 구획하는 분수령을 이뤘다. 민족적 총화를 이룩한 3·1운동의 과정에서 한국인은 더 이상 군주를 따르는 백성이 아니라, 국가의 주인으로서 자리매김 되기에 이르렀다.  

만세운동에서 여성들의 참여는 민족독립에 대한 한국인의 열망이 어떠했던가를 잘 보여줬다. 수많은 여성들이 길거리로 나와 시위를 한다는 것은 전통사회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혁신중의 혁신이었다. 그것도 남성에 종속된 위치가 아니라 여성 스스로가 주체가 돼 만세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는 3·1운동을 통해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위치가 향상되어 갔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자유주의 이념이 정착돼 갔던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제 여성이 더 이상 가정에만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당당하게 사회구성원으로서 성장한 것이다.

이와 함께 주목할 것은 1919년 제정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에서 여성에게 보통 선거권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흔히 민주주의가 꽃폈다고 하는 영국의 경우 여성에게 보통선거권이 주어진 것은 1927년의 일이었다.

그 뿐 아니라 한국을 식민지배 하던 일본에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이룩된 것이었다.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처럼 3·1운동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도 획기적 전환점을 이룬 혁명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3·1운동은 독립선언서에서 밝히듯이 반인류적 제국주의를 퇴치하기 위한 인류평화운동이기도 했다. 당시 세계에는 인류의 80%에 달하는 피압박 약소민족이 제국주의 침략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중국과 인도, 필리핀 등 피압박민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3·1운동은 약소민족독립의 길을 열어간 세계사적 등불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3·1운동은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도 크게 기여한 인도주의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19년이면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일어난 3·1운동은 참으로 위대한 민족운동이자 진정한 평화운동이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3·1운동의 정신과 의미를 새 시대에 맞게 계승·발전시켜야 할 책임과 의무를 지니고 있다.

우리 모두가 3·1운동의 정신을 잊지 말고 국민통합, 나아가 인류 평화를 위해 힘을 쏟아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을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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