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와 양자역학, 동전의 뒷면이 던진 질문

  • 등록 2026.02.11 16:3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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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책주간지 <K-공감>

"슈프 제수트."

 

인생은 우리 맘대로 할 수 없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시작을 빌어줄 수 있다는 아르메니아 새해 인사다. 

 

아르메니아에서 새해를 맞았다. 아르메니아는 튀르키예, 이란, 아제르바이잔, 조지아에 둘러싸인 남코카서스의 국가로 인구는 300만 명 정도인 작은 나라다. 아르메니아 예레반국립대학에서 초빙교수로 2월까지 머물며 강의를 할 예정이다.

 

대학 게스트하우스에서 생애 제일 조용한 새해를 맞이했다. 숙박하는 외국인 손님은 다 돌아가고 나 혼자만 남았다. 직원들도 새해 연휴 동안 "교수님 부탁해요!" 하고 나에게 열쇠 꾸러미를 맡긴 채 다들 집에 가버렸다. 아무도 없는 3층 건물의 게스트하우스와 눈 쌓인 텅 빈 학교. 친구들이 자기 집에서 새해를 함께 맞이하자고 초대했지만 그냥 혼자 지내고 싶었다. 내가 외로이 아주 멀리 떨어진 평행우주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또 이렇게 혼자 지내본 적이 얼마 만인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하기도 했다. 

 

서울에 있는 가족들에게 새해 인사를 전하고 난 뒤 시차로 5시간이 지난 후에 새해를 맞았다. 아르메니아의 공식적인 새해는 1월 1일이지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전통에서는 1월 6일 성탄절을 새해처럼 지낸다. 301년경 세계에서 처음으로 기독교를 국가의 공식 종교로 채택한 나라가 바로 아르메니아다. 

일러스트 이기진

 

에티오피아는 매년 9월 11일이 새해(윤년에는 9월 12일)다. 새해가 9월인 이유는 이 무렵이 우기가 끝나고 땅이 다시 살아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세계 대부분이 쓰는 그레고리력과 달리 에티오피아력은 13개월로 되어 있다. 그레고리력보다 7~8년 정도 차이가 난다. 그래서 우리가 2026년을 살고 있을 때 에티오피아는 2018년에 머물러 있다. 2026년 9월 11일이 돼야 2019년으로 넘어간다. 이렇듯 새해는 나라마다 각자의 달력과 전통에 따라 도착한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축복하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새해가 우리에게 준 선물 중 하나는 동전의 뒷면을 살펴볼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동전의 뒷면엔 게으른 관성이 숨겨져 있다. 버리지 못했던 미련, 미뤄둔 일, 하고 싶었던 일, 늘 변화를 결심했지만 번번이 원점으로 돌아오는 현실,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하는 마음, 변화 앞에 서성거렸던 마음. 새해가 되면 뒤집혀 있는 동전의 뒷면이 나에게 매번 새롭게 뉴턴의 관성 법칙 같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왜 마음에는 관성이 존재할까. 

 

이런 머뭇거리는 마음의 상태를 양자역학적으로 표현하면 '중첩'이다. 중첩의 사전적 의미는 여러 사물이나 현상이 하나로 겹쳐 있는 상태를 말한다. 양자역학적으로는 서로 배타적이고 이질적이지만 가능한 상태가 동시에 겹쳐 있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양자라면, 우리의 마음은 흔들리는 물결 같은 파동이다. 마음을 정하기 전까지 양자의 파동함수처럼 원자핵 주위를 떠돌고 있다. 현실의 가능성과 간섭하려고 노력하며 늘 가능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가능할까, 불가능할까.

 

고전역학에서 운동 법칙을 세운 과학자가 뉴턴이었다면 양자 영역에서의 운동 방정식을 만든 물리학자는 에르빈 슈뢰딩거였다. 그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 실험을 통해 관측이 현실의 상태를 바꾼다는 양자역학의 난제를 드러낸 과학자다. 슈뢰딩거는 1926년 파동역학을 발표해 전자의 운동을 확률적 파동함수로 설명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안했다. 그리고 이 업적으로 1933년 폴 디랙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슈뢰딩거의 방정식은 현실이 확정되기 전에는 가능성의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삶에서도 어떤 결심은 측정되기 직전의 양자 상태처럼 가능성의 영역에만 머무른다. 그리고 선택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현실도 한 방향으로 굳어진다.

 

올해 마음먹은 게 있다. 그동안 미뤄왔던 그림 그리기를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림을 그려 무엇을 하려고? 이제부터 그림을 시작해 뭐 하려고? 이런 질문은 나에게 의미 없다. 그림은 억눌렸던 본능이 아니라 항상 나를 충실히 따라다녔던 내 고독의 그림자였다. 내가 그림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 성공의 기준은 내가 만족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에 있다. 그 확률은 얼마나 될까? 희박하겠지만 꿈 같은 확률은 존재할 수 있다. 

 

확률이론에서는 '확률의 꼬리'가 있다. 확률 분포에서 아주 드물지만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은 사건들이 모여 있는 끝부분을 말한다. 확률은 매우 낮지만 0은 아닌 영역이다. 나에게 그 꼬리의 확률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마지막 기회를 붙잡아라!

 

아르메니아에 올해는 눈이 많이 온다. 자고 일어나면 눈이 쌓인다. 하루하루 조금씩 쌓이는 눈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마치 인상파의 그림 같다. 눈길을 걸으며 동전의 뒷면에 뭐가 또 놓여 있는지 생각해본다.

김명성 기자 kms40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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