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 일제 무단통치의 원흉 ‘아카시 헌병사령관 친필서한’ 최초 공개

  • 등록 2016.08.14 12: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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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자랑스러운 정신과 올바른 민족의 정체성이 살아 숨 쉬는 곳, 독립기념관
- 의병탄압과 무단통치의 주범인 아카시 헌병사령관 친필
- 헌병경찰을 기반으로 무단통치의 구상을 밝힌 실증자료

(한국방송뉴스/김한규기자) 독립기념관(관장 윤주경)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광복71주년을 맞아 의병탄압과 무단통치의 주범인 일제의 이른바 한국주차헌병대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의 친필서한을 입수하여 8월 12일 오전 10시 독립기념관 자료실에서 최초로 공개한다.


이 서한은 1910년 경술국치 전후 한국민 강권탄압을 주도한 아카시의 무단통치 정책의 핵심 주장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침략본질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자료이다.
 

▲수집경위와 규격


2016년 일본 교토(京都)의 개인 연구자로부터 인수한 것으로, 일본 두루마리 형태로 배접되어 있다. 자료 규격은 가로 11미터 17Cm, 세로 18Cm로, 일본 고어로 작성된 장문의 난해한 초서체 아카시 친필이다.


▲ 무단통치, 헌병경찰제 주창


1909년 8월 3일 아카시가 자신의 후임자로 임명된 사가키하라 쇼조(榊原昇造) 헌병대장에게 보낸 서한으로, 자신이 2년간 재직한 경험을 바탕으로 ‘효과적인’ 한국 지배를 위해 이른바 정책 조언을 한 것이다. 의병 탄압을 완료하고 식민통치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한국주차헌병(이하 헌병)이 한국의 이른바 치안유지 경찰권까지 장악해야 한다는, 곧 헌병경찰제 시행을 강력히 주장한 내용이다.
“헌병은 메이지(明治) 40년(1907) 10월, 즉 소관이 처음 명을 받아 800명의 헌병을 거느리고 한국으로 올 당시 육군대신 데라우치(寺内) 대장 각하는 한국주차헌병의 조례에 의하여 한국의 경찰(치안유지)은 헌병이 주로 이를 담당하고, 한국 경찰을 사용하여 그 목적을 이루도록 훈시하였다. 그리하여 소관이 재임한 약 2년 동안 한국 치안의 권한을 헌병이 아직 인수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경찰과 양립해 있다. (중략) 이 점에 대해서는 육군대신이 자주 전 통감 이토(伊藤) 공에게 그 불가함을 진언했다고 들었다. 직무를 맡은 저도 또한 자주 이토 공에게 헌병의 경찰권 발전의 필요성과 권능을 말씀드렸다. 또 현재의 통감 소네(曾禰) 자작에게 몇 차례 메이지 40년 10월 칙령 한국주차헌병조례에 의거하여 그 권능의 여행(勵行)을 요구하였다.”


▲ 한민족 항일투쟁 탄압에 가장 효과적 수단으로 헌병경찰제 주장


의병탄압이 거의 완료되는 1909년 중반 시점에서 장차 한국 병탄 후 한민족 탄압의 새로운 모델로 무단통치-헌병경찰제 시행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제기하였다.
“불측한 백성을 제어하고 분쟁과 소요의 화근이라 할 수 있는 (중략) 이 새로운 보호국에서 군도의 광채와 다갈색을 싫어하여 보통의 경찰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문관 기질은 배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07년 시행된 한국 통감의 헌병 지휘권은 헌병이 한국의 행정 경찰권까지 장악하는 것을 명시하고 이를 전제로 부여한 것이므로 이를 조속히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만약 헌병이 경찰의 전권을 장악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 오히려 헌병은 일종의 식민지병이 되어 통감의 휘하를 벗어나야만 한다. 통감이 헌병을 경찰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헌병이 통감에 부속될 이유는 전부 소멸하게 된다. 요컨대 한국에서 헌병이 순사를 아우르고 경찰의 전권을 차지할 필요가 있다.”
헌병의 권한 확대를 위해 ‘헌병대장(隊長)’의 직위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헌병대사령관’으로 직함을 승격할 필요성이 있다고 역설하였다.
 “헌병대장이라는 명칭은 소생이 싫어하는데 이는 그 이름이 너무 작기 때문이다. 고로 한국주차헌병사령관이라는 명칭을 (중략) 소생은 희망하였습니다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 의의 및 평가


이 자료는 1910년 경술국치 전후, 곧 1907년부터 1914년에 이르기까지 8년간 최선봉에 서서 한국민을 철저하게 탄압한 헌병대사령관 아카시의 무단통치, 헌병경찰제 주장 등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서한에서 아카시가 역설한 헌병의 한국 경찰권 장악(헌병경찰제), 헌병대사령관 직위 확보 등의 주장은 1910년 6월 데라우치 통감(국치 후 총독) 부임 이후 그대로 실현되어 경술국치 이후 일제 무단통치의 근간이 되었다. 이 자료를 통해 아카시는 한국민 무단 탄압정책을 제시하고 이를 실제로 집행한 원흉임이 확인된다.


▲ 아카시 모토지로, 의병탄압․무단통치의 최선봉


1864년 후쿠오카시(福岡市)에서 태어났으며, 1907년 10월 9일 한국주차헌병대장으로 부임하여 왕산(旺山) 허위(許蔿) 의병장을 직접 신문하는 등 의병 탄압의 주역으로 악명을 떨쳤다. 1908년 12월에는 일제 침략군인 이른바 한국주차군의 참모장을 겸직하였고, 오늘 공개하는 서한의 수신자인 사가키하라 쇼조(榊原昇造)에게 1909년 8월 1일 헌병대장직을 넘겼다. 국치 직전인 1910년 6월 절대적 후원자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한국 통감으로 부임하여 한국주차헌병대를 한국주차헌병대사령부로 확대 개편할 때 초대 헌병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무단통치의 기틀을 다졌고 1914년 4월까지 재임하며 한민족의 암흑기를 철저하게 강요한 원흉이다. 한국 재임 시 특히 ‘기포성산(碁布星散, 바둑판 포석과 하늘의 별처럼 헌병을 총총히 배치함)’ 탄압방식으로 악명을 떨쳤다. 1918년 대만총독으로 부임한 뒤 이듬해 죽었다.



김한규 기자 khk21art@ikbn.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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