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 다시 ‘우생순’을 생각한다

  • 등록 2016.08.04 13:5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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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봉 언론중재위원·국민대 초빙교수

나에게는 언제부터인가 올림픽하면 바로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우생순’이다. 2008년에 임순례 감독이 만든 영화인데 아직도 그 장면과 감동이 눈에 선하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가 대중의 큰 관심을 받으면 별명이나 애칭을 얻곤 한다. ‘응팔’(응답하라 1988)이 그랬고 ‘태후’(태양의 후예)도 그랬다. 본래의 긴 제목보다 두세 음절로 축약된 준말로 말할 때의 느낌은 왠지 다르다. 무언가 가슴 한 구석에 짠하게 밀려오는 게 있다. 그 단어의 감각이 이미 체화된 거다. ‘우생순’도 그런 경우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우리나라 여자핸드볼 대표팀이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결승전에서 숙적 덴마크와 2차 연장까지 가는 혈투 끝에 승부던지기에서 패해 은메달을 딴 실화를 그린 영화 제목이다. 당시 외국 언론은 아테네 올림픽 최고의 명승부라고 했다.                                                                                                      한기봉 언론중재위원

 

이 영화는 왜 별명까지 붙었을까. 스포츠가 줄 수 있는 감동적 요소와 스토리가 잘 응축돼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영화에서 선수들은 개인의 현실과 꿈, 좌절과 고뇌, 그리고 동료와 감독과의 갈등과 반목을 딛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간다. 영화적 설정도 있지만 대부분 현실에 바탕한 이야기여서 더 가슴 뭉클하다.

여자핸드볼은 꾸준한 올림픽 효녀종목이었지만 대중적 인기가 없다보니 설움을 받았다. 하지만 무관심 속에서도 선수들은 유럽 심판의 편파 판정을 견디며 묵묵히 결승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투혼을 불사르고 후회 없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이 영화의 카피는 이랬다. ‘아무도 그녀들을 믿지 않았다.’

영화에서는 메달의 색이 중요한 게 결코 아니었다.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인간승리를 그렸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역경과 고난을 딛고 한 발짝 한 발짝 꿈을 이뤄가는 그 과정의 스토리가 우리를 감동시킨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생순’에 감사하면서도 빚진 느낌을 갖고 있다.

3일(현지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퓨처 아레나에서 열린 여자 핸드볼 대표팀 훈련에서 오영란과 선수들이 훈련에 열중하고 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3일(현지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퓨처 아레나에서 열린 여자 핸드볼 대표팀 훈련에서 오영란과 선수들이 훈련에 열중하고 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그 후 ‘우생순’은 한국 올림픽의 꿈을 말하는 상징어처럼 되었다. 당시 멤버였던 골키퍼 오영란 선수는 은퇴 후 8년 만에 임영철 감독의 간곡한 요청을 받고 태극마크를 다시 달았다. 44세 최고령 국가대표이면서 최다인 5번째 올림픽 출전이다. 그의 한이 이번에는 풀어지길 간절히 기원한다.

곧 리우 올림픽의 팡파레가 울린다. 국가대표들은 ‘10-10’(금메달 10개-10위 이내)을 목표로 삼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았다. 누가, 어느 종목이 금메달 기대주인가를 분석하는 기사들이 넘친다. 양궁 사격 펜싱 배드민턴 태권도 유도 레슬링 여자골프 축구… 손연재 진종오 이용대 기보배 김지연 신아람 남현희 김연경 손흥민 박인비 박태환… 자랑스러운 이름도 있고 안타까운 이름도 있다. 

금메달은 국가의 자존심이자 선수 개인에겐 땀과 눈물의 확실한 보상이자 영광이다. 나도 결승전이 있는 날엔 아마 TV 앞에서 가슴을 졸일 것이고 환호성을 질러댈 것이다. 그렇지만 금메달만, 금메달리스트만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금메달 수에만, 경기 결과에만 너무 연연하는 올림픽 감상법을 넘어보자는 생각에서 ‘우생순’ 이야기를 꺼냈다.

올림픽의 진정한 가치는 스토리에 있고, 진정한 재미는 감동에 있다고 생각한다. 역설적으로 우리 핸드볼 선수들이 아테네에서 금메달을 땄더라면 ‘우생순’이 만들어졌을까, 영화적 재미와 감동은 그만큼 더 컸을까?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올림픽 스타디움은 장엄한 휴먼스토리의 장이다. 선수마다 드라마의 주연이자 연출자이다. 한 시대 영웅의 퇴진이 있다면 신성의 대관식도 있을 것이다. 행운이 있다면 비운도 있을 터다. 때론 오늘의 그를 있게 만든 어느 아프리카 어머니의 눈물과 희생의 스토리가 우리를 더 감동시킬 수도 있다. 꽃만 바라볼 게 아니라 꽃을 피우게 한 햇빛과 바람과 비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여름,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고 사회적 분노를 일으키는 뉴스들이 이어져왔다. 리우 올림픽은 준비가 미흡하고 지카바이러스와 환경 치안 테러의 우려가 있다 하지만, 그래도 팍팍한 현실과 열대야를 잠시 잊게 해줄 설렘과 흥분과 감동을 줄 것이다.

200명의 국가대표 중 이번에는 누가 우리를 울고 웃길 것인가. 선수들이 자신의 SNS에 적어놓은 출사표를 봤다. 각자의 꿈이 생시가 되길 기도한다. 그리고 그들의 땀과 눈물의 스토리와 에너지가 우리 자신을, 우리 사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마중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마음껏 “대~한~민~국”을 외쳐 보자. 애국 마케팅이라며 시비 걸 사람도 없다. 모든 선수들에게, 그리고 오늘의 그들을 있게 한 사람들에게 리우의 8월이 ‘우생순’이 되길.

2016.08.04 한기봉 언론중재위원·국민대 초빙교수
박기순 기자 pksd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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