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젊은 청년들이 나라를 지켰습니다!

  • 등록 2016.06.25 10: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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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특집] 6.25 전쟁 당시 ‘의병’으로 활약한 독수리 유격대를 만나다

(정책기자/조수현)  현재 대한민국 대학생들에게 내 고향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맞서 싸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과연 몇명이나 총을 들 수 있을까? 국민안전처가 국민안보의식에 대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대학생들의 약 60%만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겠다고 답했다. 이는 작년보다 약 7% 증가한 수치지만 아직 10명 중 4명은 총을 들지 않겠다는 말이다.

6.25 전쟁 당시 뜻있는 포천 청년들은 현재 대학생들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이들은 자신의 고향인 포천과 조국 대한민국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독수리 유격대를 조직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희생했다. 필자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독수리 유격대에 대해 알고 싶었다.

지난 21일 독수리 유격대 전적비(이하 전적비)에서 독수리 유격대 창설대원인 박홍진 대원과 당시 최종철 작전관의 아들인 최송학 전적비 관리소장, 독수리유격대 기념사업회 윤춘근 회장, 이용주 사무국장을 만나 독수리 유격대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독수리유격대전적비 앞에서 경례를 하고 있는 모습)
독수리 유격대 전적비 앞에서 경례를 하고 있는 독수리 유격대 관계자들. 


독수리 유격대란?

독수리 유격대는 6.25 전쟁 당시 포천에서 일어난 의병이다. 최종성·최종철 형제의 주도로 결성됐으며 서북청년단과 반공의식이 투철했던 청년 63명으로 조직됐다. 독수리 유격대는 중공군이 참전하고 한반도로 들어올 때인 1950년 11월 포천 신읍에서 창설했다. 이중 최종성 대장은 독수리 유격대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반공사상이 투철한 인물이었다.

북한 출신인 그는 공산당이 재산을 몰수하자 월남해 서북청년단 활동에 앞장섰다. 특히 그는 전쟁 전 7사단과 포천경찰서에서 대공정보원으로 활약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제 마음대로 38선을 넘나든다고 말해 ‘38박사’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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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아있는 독수리유격대 사진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현재 남아있는 독수리 유격대 사진.(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독수리 유격대 활동

독수리 유격대는 국방부에서 파견 나온 교관에게 짧은 훈련을 받은 뒤, 본부를 신읍에서 이동면 가산리로 이전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동면 낭유리 일대를 수색하라는 첫 번째 명령을 받고 근처를 수색하다가 최영찬 대원이 순국했지만,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중공군이 밀려오는 와중에도 독수리 유격대는 국군과 함께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후퇴를 하게 된다. 그들은 17연대 1대대에 배속돼 충청북도 중원군 목행리까지 이동했는데, 이는 고향 포천을 넘어 전국으로 작전범위가 확대됨을 의미했다.  

이곳에서 그들의 임무는 비행장 경계근무와 수색정찰이었다당시 야산에는 낙동강전선에서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패잔병들이 무장공비가 돼 숨어있었다. 이들은 17연대와 함께 무장공비를 토벌하면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독수리유격대전적비 옆에 있는 최종성 대장의 묘)
독수리 유격대 전적비 옆에 있는 최종성 대장의 묘.


독수리 유격대 재편과 북진, 373고지 전투

이후 독수리 유격대는 32연대로 재편성됐다. 재편성된 부대에서 박홍진 대원은 소대장이 됐다. 독수리 유격대는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잘 막아내고 32연대와 함께 양평에서 청평 발전소, 가평, 현리, 금화까지 진격했다. 

전쟁이 1년 지난 19516월, 전쟁은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3차 세계대전으로의 확산이 부담된 미국과 소련이 협상을 시작했고, 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중부전선을 중심으로 고지전이 일어나게 된다. 물론 이 고지전에서 독수리 유격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홍진 대원은 “373고지전이 제일 힘든 전투였다.고 회상했다. 철의 삼각지대라고 불리는 금화-철원-평강 중에서 철원평야가 내다보이는 금화에 위치한 373고지는 국군과 북한군 모두에게 중요했다. 수색정찰을 주로 했던 독수리 유격대는 참전 후 처음으로 국군과 함께 공격전에 투입됐고, 이 전투에서 9명이 전사하는 등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휴전이 되자 32연대장의 귀향증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고 일부는 공로가 인정되지 않아 재입대를 했다. 

(373고지 승리후 찍은 사진 출처=독수리유격대 기념사업회)
373고지전 승리 후 찍은 사진.(출처=독수리 유격대 기념사업회)


독수리 유격대 전적비 이야기

전쟁이 끝난 후 독수리 유격대는 그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다가 1989년 국방부 조사에 의해 인정을 받게 된다. 이후 최종성 대장과 최종철 작전관 유가족들이 기증한 땅을 바탕으로 1991포천시 이동면 노곡2리 산146번지에 전적비가 건립됐다. 무려 약 40여 년 만에 전적비를 본 유가족들과 참전 대원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사진첩에 남아있는 독수리유격대전적비 건립 당시 모습)
사진첩에 남아있는 독수리 유격대 전적비 제막식 당시 모습.

최종학 전적비 관리소장은 “아버지의 공로가 인정돼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고 밝혔다박홍진 대원도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각오로 열심히 싸웠는데, 공로를 인정받아 매우 기뻤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독수리유격대전적비 모습)
독수리 유격대 전적비 모습.

 

(독수리유격대 대원들의 이름. 현재 5분만이 생존해있다)
독수리 유격대 대원들의 이름. 현재는 5명만이 생존해있다.


오늘은 6.25 전쟁이 발발한지 66주년 되는 날이다. 우리는 독수리 유격대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참전용사들이 지킨 대한민국을 이제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 이것이 그들의 희생에 보답하는 최소한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정책기자단|조수연gd8525gd@naver.com

황경호 기자 hkho100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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